오드리헵번 여배우 에서 천사로 오드리 헵번
오드리헵번 여배우 에서 천사로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Audrey Kathleen Ruston)
1929년 5월 4일 (벨기에) - 1993년 1월 20일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영국계 아버지지와 네덜란드의 남작 가문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의 원래의 성은 러스턴으로 헵번이 아니며, 햅번은 먼 친척 뻘이라고 한다.
그녀가 헵번이라는 성을 가지게 된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불안정 하던 시대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이름과 성을 바꾸면서 먼 친척 뻘인 헵번을
리스턴 앞에 붙여 쓰면서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익 파시즘의 신봉자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우익 파시즘은 유럽의 유행이였다고 하는데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파시즘의 문제점을 깨닫고
그 곳에서 나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랐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우익 파시즘에 깊이 관여
하면서 그녀가 6살이 되던 해 가출을 해 사지고 말았데,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가출 후 나치에 적극 동조하다
결국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했고 이후 아일랜드에
정착해 과거와 가족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에게 있어서 그녀의 아버지는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녀가 영화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스타에
오르고 난 후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 과거가 발혀질것에 대해 상당히 두려워 했고,
아버지로 부터 연락을 오드리 헵번에게 숨겼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6살이 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다.
어린 시절은 어머니 집안의 재력으로 궁핍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유럽대륙이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외가의 가세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고,
2차 대전 중에 극에 달해 오드리 헵번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바로 그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지금의 유니세프 당시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오드리 헵번이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가가 되어
세계 곳곳의 구호 활동을 하며 사랑을 전한 것도
이때 그녀를 도와준 국제 구호 기금이 큰 계기가 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어린시절 부터 발레를 좋아했고
그녀는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키는
그녀가 발레리나가 되는 꿈을 가로 막았다.
또한 전쟁 후 계속되는 가난으로
당시 오드리 헵번에게 발레리나 꿈은 헛된 꿈이 었다.
발레도 다져진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의
단역 배우로 출연을 시작 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에게 무명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소설가 콜레뜨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오드리 헵번을 캐스팅 했고,
이후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오드리 헵번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로 출연하면서 그녀 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영화 한편으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
당시 오드리 헵번은 세상 모든 여자들의 우상이였으며,
세상 모든 남자들의 연인이었다.
이후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레이디"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 했고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영화는 모두 대박을 쳤다.
이후 프랑스 유명한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을 계기로
오드리 헵번은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그녀만의 패션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오드리 헵번 결혼 과 아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출로 어머니와 생활 한
오드리 헵번 그래서 일까 그녀는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고
배우로써 유명세를 타는 것 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원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스타가 된 1년 후
1954년 오드리 헵번(당시 25세)은 당시 그녀 보다
12살 많은 배우이자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였던 "멜 퍼러"와 결혼을 했다.
이때 멜 퍼러는 이미 2번의 결혼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 후 오드리 헵번은 아들 숀을 얻었고 "멜 퍼러"가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결혼 후 오드리 헵번과 멜 퍼러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에게서 발생하는 열등감이 두 사람을 힘들게 했다.
멜 퍼러는 자신도 유명한 영화 배우이며 제작자 이지만
항상 그녀의 아내 오드리 헵번의 명성 앞에 늘 기가 죽었고,
매력적인 남자였던 멜 퍼러에게 외도의 유혹
또한 뿌리 칠 수없는 점 도
부부 생활에 문제가 되었다.
1968년 오드리 헵번은 멜 퍼러와 이혼을 하게 된다.
어린 아들 숀을 위해 이혼 만은 피하려고 했던
오드리 헵번 하지만 결국 두사람은 갈라졌고
이혼의 충격으로 힘들어 하던 오드리 헵번에게
우정 관계였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혼 후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아온 오드리 헵번에게
안드레아 도티는 따뜻한 가족과 친척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는것과 같았다.
결국 이듬해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에서
안드레아 도티의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안드레아 도티는 오드리 헵번 보다 9살 연하 였다.
두번째 결혼을 한 오드리 헵번은 평범한 배우자의 삶을 원했다.
첫번째 결혼에서 그녀가 유명한 여배우로서
겪었던 남편과의 불화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 도티는 유명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사랑 한것이지 평범한 가정주부
오드리 헵번을 원한것이 아니었다.
오드리 헵번 과 도티 사이에서 아들 루카가 되어났지만
두번째 결혼이 오드리 헵번에게는
행복한 삶을 안겨 주지는 못했다.
안드레아 도티는 다른 이탈리아 남자 답게 외도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남편의 빈번한 외도는 가십기사로 다루졌고 ,
결국 오드리 헵번은 1979년 두번째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후 오드리 헵번은 진정한 소울메이트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났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오드리 헵번은 당시 로버트 월더스와 관계를
"결혼이 서로에게 얻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이 충만 하다"고 말했다.
로버트 월더스는 오드리 헵번이 구호 활동을 할때
그녀를 도왔으며 오드리 헵번이
죽는 순간 까지 그녀의 옆을 지켰다.
세계적인 스타였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 그리고
결혼의 실패 하지만 그녀가 죽는 순간 까지
구호활동을 펼치며 세상에 베풀고 간 그녀는
영원한 스타 여배우 이자 진정 천사가 아닐까?
오드리 헵번의 유서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하게 말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에서 치유되어야 하고
낡은 것에서 새로워져야 하며
병에서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에서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에서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핟면 네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손은 자기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